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 (문단 편집) === 언론 문제 === [[기레기|언론도 원인 중 하나였다.]] 조선인이 화교를 향해 나타낸 경멸적 태도의 유래는 기원을 [[청일전쟁]] 이후까지로도 볼 수 있다. 1896년 5월 21일 독립신문에선 중국인을 거머리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다만 당시의 멸시 의식은 주로 상층 개화파 지식인들에게만 국한되었을 뿐 민중에게 넓게 퍼진 건 아니다. 그러나 1920년부터는 화교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사회 전반에 퍼져나가면서 이런 태도는 더 이상 상층 개화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0] 당시 언론에서는 중국인을 ‘흉악한 중국인’, ‘가증스런 중국인’, ‘수상한 중국인’ ‘無道한 중국인’, ‘살기 있는 중국인’, ‘잔인한 중국인’, ‘무지한 중국인’, ‘음흉한 중국인’ 같은 말로 표현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每日申報는 물론 時代日報, 中外日報 에서도 이렇게 묘사하였다. 1920년대에도 반일연대 시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친일 매체 여부를 떠나 전체적인 인식은 저러했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2] 언론에선 중국인 거리를 '중국인 거리 = 아편굴 = 악마의 소굴'이라는 이미지로 형상했다. 그런 이미지는 매일신보 같은 식민주의적 언론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조선인 언론이 만들기도 하였다. 언론들은 평범한 경제활동을 하는 중국인도 많은 거리도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서 과장했다. 중국인 거리에 살던 중국인들 중 일부를 근거해 "대개" 모르핀 중독자로 과장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의 거리는 음침하고 충중하고 마굴과도 같은 기분이 들고, 그들의 말소리나 음흉한 음성은 어디로 보든지 음모적 민족이다.』, 『중국인의 국민성은 본시 음흉한 것』따위의 국민성이나 종족성을 논하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중국인 거리=마굴'이란 표현에는 이곳을 청소해야 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오미일, 일제강점기 경성의 중국인거리와 "마굴" 이미지의 정치성, 동방학지 163집, 2013, 26~27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